배우 겸 감독 손창호는 1970년대 얄개 행진곡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여 이승현과 함께 얄개 스타로 큰 인기를 끌었던 대중들에게 무척 친숙한 인물입니다. 손창호 프로필 얄개 딸 손화령 등 다양한 정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손창호 프로필 얄개 딸 손화령
손창호 프로필부터 살펴보면 1952년 4월 12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서울봉래초등학교, 중동고등학교와 단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습니다.
이승현과 함께 국민들에게 큰 웃음과 재미를 선사했던 그가 이토록 불우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을 등질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의 불행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며 많은 팬들은 그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 졌지만 당대의 청춘스타였던 손창호를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할게요.
손창호는 중동고 시절 연극부에서 연기를 배워 1968년 제7회 전국남여중고교 연극대회에서 ‘놀부전’으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고 단국대 영문과를 재학 중이던 1970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는데 김수미가 그의 동기입니다.
드라마 ‘왜 그러지’, ‘제3교실’, ‘알뜰가족’ 등 작품으로 유명세를 날리기 시작했고 영화에서는 얄개 시리즈 등 하이틴 영화에 출연하여 이승현과 함께 청춘스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퉁퉁한 얼굴에 코믹하고 친근한 이미지로 대중 앞에 나선 손창호는 당시 이덕화, 임예진 등과 호흡을 맞추며 하이틴을 대표하는 청춘스타의 대명사였습니다.
CF도 섭렵해 그는 대중들에게 아주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과자 속에 아이스크림이 들어간 빙과류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해태제과의 시모나 광고에 출연해 당대 청소년의 우상이었던 임예진과 알콩달콩 웃으며 연기하던 모습은 그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안겨줬습니다.
이 외에도 부라보콘(브라보콘), 일번지라면, 싱글콘 등 수많은 CF에 출연했습니다. 또한, 어린이 TV프로그램 ‘꿈나라 별나라’의 MC, ‘손창호 임예진의 청춘만세’ 등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DJ를 맡는 등 다양한 방송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는 주연보다는 익살스럽고 명랑하며 에너지와 활기가 넘쳤던 조연으로서 청춘스타로 급부상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던 그의 인생에 점차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였지만 가족사는 그리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첫 불행은 그가 서른 살일 때 찾아왔습니다. 4살 연하의 아름다운 신부를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제주도 신혼여행을 다녀올 때만 해도 그는 불행을 예측하지 못했으나 신혼생활 일주일째로 접어들면서 갈등이 일어났고 4개월 만에 결별 하는 사태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만 해도 그는 젊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쉽게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그의 불행의 씨앗은 무리한 영화 연출 및 제작 작업 실패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후 그는 쇄도하던 드라마와 영화 출연 제의를 전부 뿌리치고 1983년 일본의 니혼대 영화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유학은 손창호의 배우 인생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를 추락시키는 첫 단추가 됩니다.
1987년 영구귀국 후 드라마 ‘첫사랑’으로 복귀했지만 팬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 이후 방송국이나 영화계에서 그에 대한 섭외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이 당시부터 그는 이미 당뇨와 신부전을 앓고 있어 치료에 상당한 재정적 압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면 준비한 만큼 나운규의 아리랑 정신을 보여주고 싶다며 자신 있게 외쳤습니다. 1990년에 자신이 배운 감독 실력을 바탕으로 영화 제작사 ‘월 촌씨네마’를 차려 선보인 작품은 한국 여성의 일본 술집 생활을 그린 ‘동경 아리랑’이었습니다.
시나리오, 주연, 제작, 감독 등 1인 4역을 맡아 활약했으나, 흥행에 참패하며 막대한 피해를 안겼습니다. 영화가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금전적 압박은 더 커졌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흡연과 음주, 불규칙한 식사는 더욱 심해져 그의 건강을 악화시킨 것이라고 일각에서는 보고 있습니다. 무리한 사업의 추진보다 치료와 금주, 금연 등 건강관리에 힘썼다면 그가 그렇게 일찍 우리 곁을 안 떠나지 않았을까 안타까움의 시선 또한 있습니다. 그러던 중 1993년 공개시트콤 ‘김가이가’에 캐스팅되어 재기를 노리고자 했으나 야생 불법약초 재배 및 흡연 혐의로 구속된 뒤 더 이상 방송활동조차 못하게 되었습니다.
1995년 MBC 3.1절 특집극 ‘노래만들기’ 이후 그는 그해 SBS ‘깊은밤 전용효 쇼’에 출연해 실명위기를 가까스로 극복하고 목회자로 새로 태어나기까지의 고난과 근황을 시청자들에게 들려줬으나 이내 당뇨병과 만성신부전 장애를 앓아 오랜 재정 문제로 치료비를 대지 못해 행려병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빚에 쪼들려 방황하던 그는 홀연히 대중으로부터 모습을 감춰버렸고 그렇게 잊혀져가던 1998년 KBS ‘영상 기록 병원 24시’를 통해 충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손창호는 10년 동안 일본을 오가며 어머니의 중풍 치료제를 구하러 다녔던 효자 였지만, 정작 자신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뇨에 나쁜 음식, 흡연, 음주를 즐겨 이틀에 한 번씩 투석을 받아야 할 만큼 몸 상태가 나빠진 상태였습니다. 투병 와중에도 손창호는 연예계로 재기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지만, 눈을 감기 전 양쪽 눈을 모두 실명했고 끝내 재기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시커먼 얼굴에 초점 없는 퀭한 눈동자의 그는 시한부 선고에도 불구하고 연신 담배를 피웠지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예요?”라는 질문에 메마른 목소리에 혼미한 정신상태였음에도 “바다요. 바다가 보고 싶어요. 쪽빛 속초바다.”라고 답했고, 이는 많은 이들에게 애잔함과 눈물을 자아냈습니다.
그는 서울 삼각산 밀알 기도원을 오가며 통원치료를 받던 중 방송이 나간 며칠 뒤인 1998년 8월 5일 새벽에 4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떠난 후 장례식장에는 정태섭 MBC 탤런트실장과 강남길, 김수미, 심양홍 등 동료 연예인들이 조문을 왔고 이후 그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속초바다에 뿌려졌습니다. TV 화면을 통해 쪽빛바다가 보고 싶다고 간청하던 그는 자신의 꿈을 뒤로하고 우리 곁을 떠났지만, 손창호의 딸 손화령이 배우로 데뷔해 아버지의 못다한 꿈을 잇고 있습니다.
손화령은 지난 2004년 KBS 어린이드라마 ‘울라불라 블루짱’으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것은 아닌가 하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지만 오디션을 치러 당당하게 배역을 얻어냈습니다. 이후에도 드라마 ‘온에어’, ‘바람의 화원’, ‘내 딸 서영이’, ‘심야식당’, ‘동백꽃 필 무렵’, ‘오 마이 베이비’, 영화 ‘모던보이’, ‘상류사회’ 등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손화령은 당시 한 언론이 아버지에 대해 가족에 의해 버려진 사람으로 보도해 이런 악의적인 기사와 루머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아픔을 가진 채 살아왔습니다. 이에 대해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왜곡된 부분이 상당히 많았지만 당시엔 내가 어렸기 때문에 정정보도와 같은 별다른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그냥 피하고 숨고 싶었다.”라며 “이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오래됐고 나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많이 편해진 상태.”라고 운을 뗐습니다.
손화령은 “예전에 보도가 된 대로 우리 가정이 평탄하지 않았던 것은 맞다. 아버지는 연기자로서 훌륭한 배우였지만 집안에선 그다지 성실한 가장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나와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었고 어머니와도 헤어지고 말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런 아버지가 솔직히 미웠던 적도 많다. 그래서 부모님 결별 후엔 거의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다.”며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내가 아버지의 삶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매몰차게 대화를 단절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며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또한 그녀는 “여태 활동하며 내가 손창호의 딸이라는 것을 잘 알리지 않았다. 어설픈 내 연기로 인해 아버지 연기 인생에 오점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며 “이번에 큰 역할을 맡은 만큼 처음으로 아버지의 딸임을 떳떳이 밝힐 수 있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많은 도움을 주셨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 손창호는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며 절대로 먹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는 곳마다 딸을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어릴 적부터 공개방송 현장이나 방송국에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레 배우라는 직업을 선망하게 되었습니다.
손화령은 “아버지랑 방송국이나 공개방송이 열리는 놀이동산 같은데 따라가는 게 좋았다. 그 곳에 가면 동료 연기자 분들이 귀엽다며 용돈을 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가족들하고 여행을 참 많이 다니셨는데 여름에는 바닷가에 가고 눈이 오면 설악산으로 떠나곤 했었다. 평소에 너무 바쁘셔서 한꺼번에 잘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며 부녀지간의 추억도 전했습니다.
또한 “당연히 아버지 같은 연기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감히 어떻게 아버지와 저를 비교할 수 있겠나. 아버지는 항상 책을 보시는 분이셨는데 그 학구열부터 제가 못 따라간다. 바람이라면 저를 그냥 손화령으로만 봐주셨으면 좋겠다. 이름을 생각하면 유쾌해지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누구를 모델로 삼기보다 스스로 모델이 될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배우로서의 바람도 밝혔습니다.
쪽빛 푸른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마지막 바람에 남겼던 손창호가 부디 그곳에서는 아픔 없이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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